<초학제 독립 연구단>

국악의 과학적 이해와 인공지능 국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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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주제

 

국악의 과학적 이해와 인공지능 국악

 

정재훈 (POSTECH) / 총책임자

 

 

1. 연구의 목적과 배경

 

       한국의 음악은 상고시대의 제천행사에서 음악이 사용되었다는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역사가 매우 오래 되었다. 우리 음악이 발전하면서 중국 음악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중국에서 음악이 들어오는 경우 끊임없이 변형되고 재창조되어 왔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다. 예를 들면 중국에서 들어온 보허자가 후에 수연장지곡(壽延長之曲)과 송구여지곡(頌九如之曲)으로 이어지면서 좀더 새로운 형식으로 발전된 경우나 당의 제례음악에서 벗어나 세종 때 새롭게 종묘제례학을 작곡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독특한 우리 음악이 만들어져 왔다. 우리나라의 최초의 음악이론서라고 할 수 있는 악서 [악학궤범 樂學軌範]은 한국 음악의 근간을 이루는 음악 창제의 원리와 철학 이론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악학궤범에서 다루어지는 음악 이론은 매우 철학적이고 우주론적이며 논리적인 토대를 가지고 있다. 음악 창작이 기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기본적으로 음악적 영감에서 시작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한국 음악의 근본이 이와 같은 논리적 우주론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우리 음악이 어떻게 작곡되었고 어떤 음조(音調)의 구성으로 되어 있는지에 대한 원리를 밝히는 연구에 있어서 수학적 접근법이 매우 유효할 수 있다. 실제로 정악곡의 해석은 특별한 이론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정악곡을 가르치는 선생의 가르침에 의존해 오고 있는데 이 가르침의 기저에는 예술가적 영감이나 직감으로 감지해낸 숨겨진 작곡이론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통일적인 언어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국악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인지하는 정교하고도 정밀한 원리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서 밑도드리(수연장지곡) 음악은 도드리 형식 혹은 환입(還入)이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이견의 여지가 없고 도드리를 구성하는 5개의 음조의 구성 역시 어울리는 음과 그렇지 않은 음들의 적절한 배치가 환입을 만들어 내는 기본적인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론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환입과 어울리는 음의 구성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 정밀함을 만들어내는지, 이 구성이 어떤 식으로 짜여져 있는지에 대한 통일되고 계량적인 이론은 아직 없다. 게다가 서양음악에 비해 우리 음악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특징들, 예를 들어서 시김새와 장식음 등은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서 정리되어 왔고 몇가지 이론으로 설명되어 왔지만, 이러한 이론은 그것들의 생성원리라기 보다는 오히려 규범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정악을 연주하는 연주자들이 음악적 감수성으로 느끼는 이론을 가시적으로 이끌어 낼 수 있는 연구는 수학적 연구라고 생각된다.

       한국의 전통음악에 대한 근대적 개념의 이론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는 일제 강점기부터라고 할 수 있다. 뚜렷한 국악연구회와 동종의 연구단체가 없던 상황에서 국악 연구는 개인 연구가 주를 이루었고 연구결과는 주로 신문과 잡지를 통해서 발표되었다. 대표적인 연구는 1940년 이혜구의 <양금신보의 사조(梁琴新譜 四調)> 등이 있다. 암울한 시기임에도 많은 연구가 발표되었던 것은 놀랄만한 일이지만 연구의 내용은 국악 음악 이론보다는 국악과 관련된 혹은 국악이 연구의 담화에 부수적으로 참여하는 민속학 등이 주를 이루었다. 개인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국악 연구는 해방 후, 1950년 국립국악원 발족, 1959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내 국악과 창설, 1961년 국악회협회 창설, 1971년 한국음악연구 학술지 1집 발간 등을 거치면서 국악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점진적으로 진행되어 왔다. 이렇듯 국악 연구의 역사는 매우 장구한 우리 음악의 역사에 비하면 극히 짧은 시기에 이루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그 중 국악의 이론 연구는 그 역사가 더더욱 짧고 저변이 넓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특히 본 연구에서 다루고자 하는 국악의 수학적 연구는 짧은 국악 이론 연구사()에서도 극히 제한적이었고 그 내용 역시 매우 한정되어 왔다. 예를 들어서 한국 전통 악기의 괘율에 관한 연구는 조화평균, 기하평균, 무리수를 이용한 평균율 등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어서 국악의 수학연구 분야에서 다루어져 왔던 연구이다 (물론 따라서 이러한 연구를 시작한 연구자들은 이 분야의 최전선 첨병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외의 수학 연구 역시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진행되어 왔는데 서양음악이론을 이해하는 있어 근본적이고도 중요한 단서를 찾기 위해 수학을 이용하는 방식의 연구나 국악의 작곡 원리에 대한 본격적인 수학적 연구는 거의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우리 정악의 창작 원리와 그 고유의 특징들을 수학적으로 분석하여 우리 음악이 가지는 독특한 구조와 차별성, 그리고 우리 음악에 담긴 우주론적인 함의를 과학적으로 풀어내고자 하는 그 목적이 있다. 이러한 연구는 연구 제안자의 선행연구에서 보였듯이 수학연구만으로는 불가능하며, 국악 이론을 연구하는 음악가, 실제로 전통악기를 연주하는 국악 연주인, 음악을 시각화하는 미디어 연구자, 인공지능 창작과 컴퓨터 연주를 전공하는 컴퓨터 음악가, 그리고 음악의 본질적인 의미를 미학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는 철학자 등 다양한 연구자로 구성된 연구 그룹이 진행해야하는 연구이다. 본 연구는 과학자와 우리 전통 음악의 이론가와 연주자들이 공동으로 국악의 본질 이해를 위한 연구를 진행함으로써 우리 음악 연구에 새로운 학문적 분기점을 설정하고 연구된 내용을 인공지능 기법을 통해 새로운 음악 창작을 시도하여 우리 음악을 현대적으로 재현하는 시도를 하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는 과학계와 국악계에서 뿐 아니라 국악의 저변확대와 국악 교육에도 큰 반향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2. 연구의 내용

 

       본 연구단에서는 국악의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 일차적으로 정간보에 기록된 정악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즉, 발견하고자 하는 정악의 수학적 원리 정간보 데이터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하고자 한다. 따라서 정간보 데이터의 적절한 수학적 분석이 연구에서는 매우 중요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세종실록에 등장하는 정간보는 세종 때 발명된 우리 음악의 독특한 기보법이다. 조선시대에 쓰인 기보법은 정간보 이외에도 여럿이 있지만 정간보는 그 형식과 원리에 있어 매우 과학적이다. 정간이라고 하는 작은 공간에 음의 높이와 길이를 나타내는 기보법으로, 공간과 시간이 분리된 개념이 아니라 통일된 동질의 것이라는 우리나라의 고전 우주론에 기반하고 있다. 이러한 기보법은 서양의 기보법과는 상반되는 것으로 오히려 현대의 컴퓨터로 다루기에 훨씬 더 편한 정형화된 행렬의 형식으로 되어 있는 독특한 음악 기록 방법이다. 정간보를 이용함으로써 구전으로 내려오는 향악과는 달리 매우 정확하게 음악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고, 정간보가 갖가지 장식음을 동시에 꼼꼼히 기록할 수 있는 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간보 데이터는 우리 음악을 연구하는 매우 유용하다고 볼 수 있다. 본 연구에서는 이렇게 정간보에 담긴 정악곡들을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하고자 한다.

       우선, 정간보에 기록된 음악을 수치적으로 분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정간보 데이터를 디지털화하는 작업을 수행해야 다. 이 디지털화 작업은 생각보다 까다롭다. 왜냐하면 우리 음악의 독특함과 특이함은 음의 길이와 높낮이에만 있지 않고 장식음과 시김새라는 촘촘한 각주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보를 어떻게 계량화하고, 어떤 공간에 투영하고 저장할 것인가는 수학과 우리 음악을 모두 고려한 체계적인 연구를 수반한다. 따라서 정간보의 디지털화 작업은 국악이론가와 연주자들과의 협업을 통해서 진행하려고 한다. 또한 인공지능 기법을 이용하여 자동적으로 정간보의 음악 데이터를 디지털화하는 연구도 필수적으로 진행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함으로써 정간보에 담긴 수많은 우리 음악을 정확하게 데이터베이스화하여 다른 연구자들로 하여금 후속 연구에 이용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정악 데이터 구조의 수학적 분석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는 아직 문헌에 등장하지 않고 다만 본 연구를 위해 선행된 연구에서 위상수학을 이용한 시도가 있었다. 본 연구에서는 위상수학 중 호몰로지 (homology) 이론과 지속성 호몰로지 (persistent homology) 이론을 이용해서 정악 데이터의 구조를 분석하고자 한다. 음악적 아름다움의 근본이 ‘반복’과 ‘재현’에 있고 이러한 형태는 수학적으로 싸이클의 구조로 설명할 수 있어 호몰로지를 이용한 분석은 매우 적절해 보인다. 선행 연구에서는 정악의 대표적인 곡인 밑도드리(수연장지곡)와 웃도드리(송구여지곡)의 해금보를 시김새와 장식음을 배제한 데이터에서 분석하였는데, 본 연구에서 이들을 고려한 보다 다양한 정보를 담보한 데이터의 호몰로지 분석을 시도하려고 한다. 호몰로지 연구를 통해서는 다양한 싸이클들과 배치의 모양새가 도출되는데 이러한 모양은 정간보에 드러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 호몰로지의 내용이 어떻게 음악적 의미를 이끌어 내는지에 대한 대답은 국악 이론가와 연주자들과의 협업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또한 본 연구는 더 나아가서 좀더 큰 규모의 정악 데이터, 예를 들어 종묘제례악과 같은 거대 규모의 합주곡 데이터 등의 분석을 시도하려고 한다. 선행 연구에서는 개별 악기를 중심으로 각 음악의 구조를 연구하여 그에 해당하는 음악을 창작하여 보았으나 본 연구에서는 합주의 경우 그 호몰로지적 구조가 어떤지에 대한 연구도 진행하려고 한다. 특히 시김새와 장식음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한국 음악의 고유한 특성이 보다 과학적으로 이해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이와 더불어 정악 데이터의 시각화 연구를 동시에 진행하고자 한다. 서양 음악의 경우 매우 오래 전부터 음악의 시각화 연구는 활발히 진행되어 왔다. 시각화는 음악을 새로운 관점에서 이해하게 해 주고 음악이라는 물리적이지만 추상적인 존재를 새로운 시각 공간으로 투영-변환시킴으로써 예전에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음악 고유의 구조를 ‘볼’ 수 있게 해 준다. 또한 시각화는 연주자들이 느끼는 직감과 영감 혹은 느낌을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해 주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어서 음악이 주는 미학적 감수성의 또다른 차원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따라서 시각화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예술이 창작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본 연구에서는 정악 데이터에 스며들어 있는 우리 음악의 창작 원리를 수학적 분석을 통해 파악하고, 파악된 음악적 구조를 바탕으로 국악을 시각화 함으로써, 국악 분야에서의 선구적인 연구를 수행하고자 한다. 이로부터 정악 데이터의 수학적 구조 연구를 통해 얻은 위상공간에서의 정악 데이터의 모양을 실제로 ‘볼’ 수 있도록 해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선행 연구에서는 서양음악의 시각화 기법을 이용하여 밑도드리 데이터를 시각화하는 시도를 하였는데 본 연구에서는 한국 음악이 갖는 고유성을 표현할 수 있는 시각화 방법을 개발하고자 한다.

       음악의 고유한 임무를 생각해 보면, 음악은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그 아름다움을 통해 내적인 감흥을 느끼게 하는 예술의 한 분야 일종의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장치는 따라서 음악은 본능적으로 인간의 본성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음악 연구의 궁극적인 목적 역시 단지 음악 이론에만 있지 않고 실제 현대인들에게 들려지고 감상되어지는 지점에까지 닿아 있어야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 연구에서는 연구자들의 연구를 통해 얻어진 결과물을 이용하여 실제 감상할 수 있는 차원의 음악을 창작하고자 한다. 특히 이러한 창작이 수학적 연구에서 나온 것이고 매우 복잡한 알고리즘을 구현하여 얻어지는 것을 고려할 때 인공지능을 이용하여 음악을 창작하고자 한다. 사실 인공지능을 이용한 음악 창작과 재연은 그리 새로운 기술이 아니다. 지금의 기술로는 간단한 코딩으로도 음악 데이터를 이용하여 새로운 인공지능 음악을 쉽게 만들어 낼 수 있다. 본 연구에서는 데이터를 흉내 내는 인공지능이 아니라 창작의 원리를 알아내고 이 창작의 원리를 학습함으로써 음악을 창작하는 인공지능 기법으로 음악을 창작하려고 한다. 최근 한국 국악계에서 국악의 인공지능 작곡과 재연 연구가 시작되고 있는 상황에서 본 연구에서의 인공지능 창작 연구는 국악계와 공학계 뿐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도 새로운 음악의 기회를 제공하고 국악에 대한 공감대를 두텁게 해주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끝으로 본 연구에서는 연구의 총체적인 결과물을 창작 음악 연주회를 통해서 학계와 대중들에게 알리고 실제로 현대인들이 즐길 수 있는 창작 국악 음악을 제공하고자 한다. 단 본 연구가 국악에 대한 수학적, 과학적 이론 분석에 주된 관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음악회나 학생교육 연주회 등은 부수적으로 필요한 경우 계획하도록 한다. 본 연구진이 오랫동안 개발해 온 가상악기를 이용하면 창작된 곡을 실제 연주자가 아니라 기계를 통해 구현해 볼 수 있기 때문에, 본 연구에서 개발된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이용하면 어느 누구라도 스스로 우리 음악을 작곡하고 즐길 수 있다. 최근 교육부에서는 초.중.고등학교의 교과 과정에 인공지능 교과 과목을 삽입하는 계획을 수립하였고 이와 발 맞추어 인공지능 교육의 붐이 일고 있다. 본 연구의 내용은 학생들의 인공지능 교육과도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인공지능을 이용한 국악음악 창작 연주회를 통해서 학생들에게 국악 창작 원리를 가르쳐 주고 직접 인공지능을 이용해서 음악을 창작하게 하고 이를 연주회 형식으로 진행하게 되면 인공지능 뿐 아니라 학생들의 국악 교육에도 매우 큰 시너지를 발휘할 것으로 보여 다소 교육적인 성과도 기대해 볼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